독감투병기

아무래도 독감에 걸렸던 모양이다. 아니, 아직 걸려 있는건가.

이틀 전 오전에 학교에서 책을 읽는데 꾸욱, 하고 편도선이 밀려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 일이 고약하게 되었다, 하는 생각을 하며 일이 어찌 되는지 잠시 보았더니 슬슬 열이 오르고 힘도 없고, 해서 일단 약국에 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감기인 줄 알았다.

점심먹고 약 먹고, 도서관에 좀 더 앉아 있다가 등짝이 점점 더 쑤시길래 일단 집으로 왔다. 편도선은 오히려 가라앉았는데, 일단 집에 와서 씻고 나니 마구 열이 나면서 온 살점이 쑤시는 거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더니 머릿가죽이 쑤시고, 발바닥을 긁었더니 발바닥이 쑤신다. 아무튼 과연 일이 고약하게 되었다고 자기확인을 한 뒤 그래도 할 건 해야겠다고 책을 보는데, 아무것도 안 들어온다.

그래 밥 먹고 누워 졸다가, 다시 앉아있다가, 물먹고 앉아 졸다가, 비몽사몽. 저녁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야간정기취침시간이 되어 누우니 자는 것도 깬 것도 아닌 상태에서 별 놈의 꿈이 다 꿔진다. 여럿 있지만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다음과 같다.

[갑, 을, 병은 수술실 조명을 배경으로 내 시야의 세 꼭지점에 둥글게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

수술복 남자 갑: 드디어 기나긴 시행착오 끝에, 우리의 실험은 성공하였다. 완전면역체를 완성한 것이다.
수술복 남자 을: 당신은 그 결실이야. 이제 당신은 어떠한 질병에도 이겨낼 수 있는 최초의 존재가 되었네.
수술복 여자 병: 사소한 부작용이 남긴 했지만, 완전면역에 비하면 가벼운 댓가지.

나: 저기요, 저 많이 아픈데요. 열도 나고…

을: 음. 그럴걸세. 하지만 이제 자네는 에이즈도, 암도, 어떠한 선천적, 후천적 질병도 해칠 수 없는 존재란 말일세.
병: 우리의 예상에 따르면 당신의 기대 수명은 180세에 근접한다네. 예상 이상이야.

나: 예상이, 예상 이상이란 건가요…

갑: 지금 말장난 할 때가 아니야. 그래, 기분은 어떤가?

나: 아프다니까요… 감기인 것 같은데…

을: 감기일 리가 없지. 이제 자네는 어떤 병에도 걸리지 않는단 말일세.

나: 계속 이렇게 아픈건가요?

병: (싸늘한 눈초리로) 나약한 녀석.

나약한 녀석… 나약한 녀석… 나약한 녀석… 이란 메아리와 함께 깨어난 게 새벽 3시쯤 됐던가. 물을 먹고 도로 누워 엿같은 기분을 추스르고 있자니 문득 드는 생각. 턱없이 열이 오르고, 전신이 아프고, 별로 코는 막히지 않고, 기침은 나지만 가래는 없이 마른 기침이고, 힘 없고…

난 비염이 있어서 감기에 걸렸다 하면 코부터 막히고, 누런 콧물이 끝도 없이 나온다. 이건 감기가 아니다. 친숙한 상기도 감염증이 아니야. 그럼 누구냐? 아무래도 예전에 책에서 본 독감인 것 같기는 한데, 어째서? 난 독감예방주사를 맞았다구. 작년 10월에. 그래. 10월. 6개월 전인가?

그러니까, 면역서비스는 기간이 종료되어 귀하의 시스템은 이제 바이러스에 노출되었다든가. 아니면 올해 보건 당국에서 찍기를 잘못해서 엉뚱한 독감을 찍으셨든가. 아니면 보건소에서 놔 준게 소금물이었든가. 그런 건가?

아무튼 그 다음날 역시 비몽사몽. 전신 쑤시고 쑤시고. 등짝 뻣뻣하고 (이건 아마 너무 누워있어서 그럴테지). 의외로 기침은 별로 안 나오고, 온 몸이 무겁고, 계속해서 밥 먹고 졸고 물 먹고 졸고. 거의 두달 치 개꿈을 다 꾸고. 왠지 몸이 종일 삶은 돼지 족발처럼 흐늘거린다.

이윽고 오늘 아침, 열도 안 나고 쑤시는 데도 없다. 오, 나았나 본데. 헌데 이 말로 못할 무력감과 허탈감은 뭐란 말인가. 등짝하고 배에 힘이 안 들어가서 어느 쪽으로든 계속 쓰러지고 싶은 게, 부실한 봉제인형같은 자세만 계속 취하고 싶어진다. 지금도 그렇다.

근 수를 달아보니 무게는 변함 없다. 아플수록 잘 먹어야 한다는 게 나의 확고한 신념이라 밥은 열심히 먹었거든. 그나마 이틀 앓은 걸로 끝나는 게 백신 덕인지도 모르겠구먼.

아무튼 내일은 좀 몸이 수습이 되어야 할 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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