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라네

요새 동생님이 물어 온 건프라를 몇개 만들다 보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글 쓰고 그림을 그리자. 그간 너무 놀았다. 뭐 퇴근이 늦어서 낙서를 못 한 것을 놓고 놀았다면야, 스스로도 좀 억울한 노릇이지만.

wokiblog-orange

WoKiblog layout ~20140320

불과 9개월 전까지도 조금은 글이든 그림이든 생산을 했다. 비록 연수기간중에 쓰고 그린 것들은 대개 녹아 없어졌지만 그건 그것대로 과정 자체가 즐겁지 않았던가. 곧 사라진대도 뭔가 만들어 내는 건 그 과정 자체에 다른 뭔가가 따라잡지 못할 재미와 초조함이 있다. 건프라도 물론 어느 정도 만드는 재미가 있지만, 조립하고 먹선 넣는 수준의 건프라 만들기는 사실 뭔가 만들어’내는’ 작업이라기보다는 잘 들어 맞는 퍼즐 맞추기와 비슷해서, 작업하는 중의 막연한 공포나 긴장감 같은 것이 부족하다.

그래서 (뭐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일단 블로그에 쌓인 먼지부터 좀 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간만에 워드프레스 업데이트도 하고, 테마도 바꾸자. 좀 심플하게. 사실 지금 쓰던 테마도 나름 시간은 들였대도 끝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아마도 예전에 텍스트큐브 블로그가 날아갔던 것 하고, 지금 블로그 모양이 실은 별로 마음에 안 들었던것이 알게 모르게 블로그 정전을 불러왔을지도 모른다. 물론 상관 없을지도 모르고.

아무튼 이렇게 일단 이걸로 시작한 셈 친다. 다 까먹어서 다시 찾아봐야 할 것도, 할 일도 많다. 하다못해 지금 시스템에는 FTP도 안 깔려있으니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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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다섯 – 송씨난봉기

송씨는 술이 들어가면 슬하의 남매들을 꿇어 앉혀놓고 우리 송나라 송자 쓰는 송씨 집안은 뼈대 굵은 양반중의 양반 집안이니라, 하고 연설을 풀어놓는 것이 일종의 취미였는데, 물론 남매들은 그러고 나면 저린 발을 주무르고 귀에 박힌 못을 뽑느라 진이 빠졌다. 흥이 좀 많이 이는 날이면 어느 날 저잣거리 족보집에서 사다 모셔놓은 족보를 오동곽에서 꺼내다가 여기 여기, 우리 삼대조께서는 여기 원님이셨단 말이지, 하고 증거를 보이기도 하였는데, 그런 날이면 남매들 귀에서 털어낸 못이 한 말은 되었다.

누가 뭐래도 풍운아였던 그는 소싯적에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 고향을 떠나 만주, 간도를 몰아치며 활로를 모색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아니, 만주를 몰아친 것은 그의 부친이라 하였던가?) 아무튼 원님 지내셨다는 조상님과 주인공 송씨 사이의 삼대 세월에 무슨 사연이 있어 가문이 증발하였는지 모르긴 모르되, 삼대독자 혈혈단신으로 맨주먹에 마늘 두쪽 뿐이었던 그는 우연찮게도 고향 근처에 커다란 수력발전소가 있었던 덕일까, 좋은 머리와 비상한 손재주를 가지고 일제시절 일본사람들 따라다니며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워서 당시의 첨단기계였던 발전기 터빈이라든가 초대형 양수 펌프 같은 대형 설비를 분해, 조립하는 기술까지 몸에 익혀 어느덧 콧방귀깨나 뀌는 기술자가 되기에 이른다. 일제시대, 조선인에게 그런 고급기술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학교 따위 반도에도 열도에도 전무하였음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그런데 해방이 된 것이다. 뭐, 누가 뭐래도 이건 일제 부역자 아니겠는가. 어느 날 빨치산들이 내려와 부역자 잡아죽인다고 마을을 휩쓸 적에 논바닥 어느 낟가리 속에 숨어서 밤새 부들부들 떨며 목숨을 건진 적도 있다 하니, 이 또한 취중 레퍼토리의 하나로서 훗날 오남매의 귀에 못 깨나 박은 소시적 무용담에 속한다.

아무튼 그 세월을 무사히 넘겨 어영부영 장가도 들고, 시대는 변하여 친일이 대수냐 부역이 뭐래냐 과거는 묻지말고 잘살아보세, 하던 즈음 송씨는 인생역전, 풍운난봉의 호시절을 맞았다. 해방 후 일인들은 모두 도망가고 육이오 전쟁 거치며 변변한 기간시설은 다 박살난 마당에, 그나마 남은 수력발전소들을 유지 관리할만한 기술을 가진 사람이 북은 몰라도 남한 천지에 그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강물을 흘려넣어 전기를 뽑는 수력 발전기란 물건은 정기적으로 분해 청소를 하지 않으면 아주 기계가 못 쓰게 된다. 송씨는 한껏 높아진 몸값에 두툼한 콧대를 우뚝 세우고, 요즘 같아서는 (뭐 요즘도 좀 그런 분위기는 남아 있다지만) 상상도 못할 어마어마한 부와 권력의 원천이었던 ‘공기업 한전’의 ‘봉급쟁이’가 되어 ‘월급’은 물론이오 ‘사택’도 받고 ‘특별수당'(그때 식으로 하면 거마비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도 받아가며 팔도의 수력발전소를 누비는 스페셜리스트가 되었다. 봉급쟁이가 뭐 그렇게 대단한 벼슬이냐고 물으신다면, 이를테면 면서기나 우체국 직원이라든가 농협직원 등등, 그러니까 관, 공직에 한 발이라도 걸친 ‘봉급쟁이’ 말고 그 시절 시골에 ‘돈’이라는 게 풀릴 꼭지란 전무하였다는 사실만 알아두셨으면 한다. 그 밖에 시골에서 돈 받고 일할 자리는 커녕, 돌아다니는 돈 자체가 없었다지.

그래서 한전 직원의 위세가 어땠는지 좀 부연하자면, 한전에는 반쯤 공식적인 음서제가 있어서 한전 직원 자식 한 명은 한전에 취직을 보장받았고, 한전 직원만 이용할 수 있는 조합 매점에서는 외상으로 아까징끼니 정로환이니 하는 것도 얼마든지 살 수 있었던지라 의사도 부럽지 않았고, 당시 한전에서 과장쯤 되면 당연히 첩을 거느리고 집도 한 채 슬그머니 올려줘서 두 집 살림 하는 게 보통이었던 시절이다. 그 중에도 송씨는 유일무이한 기술을 틀어 쥔 통에, 회사에서 나온 기사 딸린 찦차타고 행차하여, 발전소 있는 동네에 닿으면 기생 불러 접대 거하게 받고, 실제 작업에 임해서는 새끼 기술자들 턱짓으로 부려가며 일을 하였다. 그럼에도 중요한 부분, 핵심이 되는 분해 조립 기술은 아무한테도 안 가르쳐주고 본인이 직접 했는데, 그게 고의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매뉴얼도 이론도 없이 몸으로 익힌 기술이라 전수하는 것도 불가능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되 결과적으로 그의 기술은 끝끝내 그만의 것으로 남았다. 칠팔십년대가 되어 남한의 모든 신, 구 수력발전소에 신형 발전기들이 도입, 설치되는 시절에 이르러서야 그의 팔도 행차는 막을 내렸는데, 완전히 그리 되기 전까지는 정년퇴직 이후에도 구형 발전기들의 유지 보수를 위해 간간히 그가 출동하는 일이 있었다 한다.

하여간 정년 이후라든가 하는 그렇게까지 나중 이야기는 아닌, 한참 잘 나가던 시절 송씨의 한 일화를 소개하는 것이 이상의 길다면 긴 배경설명의 목적이다. 요 일화는 일종의 성공담이기는 하지만 송씨가 자식들 귀에 그다지 들려주고 싶지는 않은 종류의 이야기겠지 싶은데, 바로 그의 첩, 새끼마누라 이야기가 되겠다.

뭇 직장 동료들이 그렇게 축첩을 할진대 그 또한 작은살림을 차리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공교롭게도 하필 딴 살림 차려준 자리가 그의 자녀들이 다니던 국민학교하고 한전 사택의 중간쯤 되는 바람에, 제법 머리 굵은 위의 두 아들들은 등하교길에 ‘그 년’ 집에 눈을 흘기며 속으로(만) 욕 깨나 씹으며 다녔으나, 그 시절 아홉살도 안 먹은 그 밑의 어린 여동생은 더운 여름 논두렁 밭두렁 따라 하교길 중간쯤 오면, 피곤하고 지치고 졸리고 목 마르고 배도 고프고 해서 나무 그늘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자올자올, 졸기가 일쑤였다. 고걸 보고 새끼마누님은 애가 귀엽기도 하고 뭐 딴 속셈도 없지는 않아서 안아다가 툇마루에 눕혀 홑이불 덮어 푹 재우고, 일어나면 떡이나 밥이나 무려 찹쌀꽈배기 같은 것도 먹여서 집에 보내곤 했다. 그 덕에 속 없는 계집애는 지네 아버지 첩을 ‘작은엄마’라고 부르기에 이르렀으며, 그 ‘작은엄마’는 송씨 베게맡에서 고 쪼고만 딸래미 깜찍한거 나 주면 안되겠느냐, 하고 간살을 부리기도 하였다. 뭐 물론 어림없는 소리였으며, 두 오빠는 여동생을 배알없는 배신자, 배반녀! 라고 부르며 구박하기도 했단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 새끼마누님이 부지깽이 한 가락, 겉보리 한 톨 안 남기고 송씨가 딴살림 차려준 걸 싹 걷어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문자 그대로의 야반도주였는데, 송씨에게는 그야 말로 아닌 밤 중에 홍두깨였다. 황당한 것은 송씨가 소속되어있던 한전 지국의 기사양반이 그 새끼마누라의 야반도주를 회사 트럭까지 동원하여 도와준 것이었는데, 심지어 더 황당한 게, 그 새끼마누라하고 트럭기사가 눈이 맞아 그런 일을 벌인 것 조차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일주일 휴가를 내고 야반도주의 천리마 노릇을 한 기사는 회사로 돌아와서 ‘다녀왔습니다’하고 인사까지 했다. 뭐 이런게 다 있나 싶기는 해도, 드높은 체면에 멱살 잡을 일도 아니라서 송씨는 기사한테 그녀은 어디갔는가, 하고 좋은 말로 물어봤는데 안 가르쳐준단다.

환장할 노릇인데, 안 가르쳐 준댄다. 가만 보니까 동네 사람들 몇몇도 그년 어디 갔는지 아는 눈치요, 아니, 너 얼른 짐 싸서 도망가라고 충동질까지 한 모양인데 이건 뭐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도 안 가르쳐 준댄다. 이 놈이고 저 놈이고 안 가르쳐 준다는 데다가 무려 다들 떳떳하기까지 한 게, ‘송씨 첩 떼준다’는 대의 명분 하에 다들 좋은 일 하고 있는 셈이 된 것이다. 분하고 괘씸해서 송씨는 그 뒤로 한 두 해 동안, 시간 날 때 찦차타고 짚이는 대로 팔도를 돌며 뒤져보기도 했다지만 끝끝내 달아난 첩의 얼굴을 다시 볼 일은 없었다.

글쎄 송씨는 분할지 어떨지 몰라도, 뭐 그 새끼마누님 입장에야, 이대로 더 엉겨붙어있어 봐야 이 양반이 처자 버리고 자기한테 눌러앉아 가시버시 될 것 같지도 않은 거, 한껏 땡겨놓은 적절한 타이밍에 청춘을 회수한 거 아닌가 싶고, 생각건대 아마 마을 사람들의 공동 은폐는 순수한 선의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불과 오년 십년 새 장성할 송씨 자식들 눈치 보느라 그렇듯 철저하게 진행된 거 아닐까 한다. 지금 괜히 송씨 난리친다고 달아난 여자 행방을 불었다가, 지네 애비 닮아 목청 크고 막 나가게 생긴 자식놈들 원한을 사서 수년 뒤 무슨 화를 보려고 어줍잖게 나선단 말인가.

아무튼 그리하여 송씨의 작은살림은 간 데 없이 증발하였으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면 성공담이 될 리도 없다. 야반도주 사건 후 얼마 안 되어, 나라에서는 사회기강을 바로잡는다 하며 그때까지 열을 올리던 빨갱이 사냥에 더하여 전국구 지역구 깡패들 잡아들이고, 은근슬쩍 분위기 타서 리베이트 잘 안 떼어주고 정부 말 안듣는 회사는 공중에서 짝짝 찢어다가 말 잘 듣는 놈들한테 나눠주기도 하는 등 나름대로 구악을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여러 정리작업들 중 하나가 ‘축첩 일소’였는데, 요는 당시에도 암암리에 수두룩 하던 첩 거느린 공무원, 공기업 직원들 모가지를 상큼하게 날려버렸던 것이다. 그래 송씨가 다니던 지국에서만도 작은살림 차리고 노니던 축첩자 서너명이 하루아침에 해고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전화위복이랄까, 이 와중에 송씨는 새끼마누라가 때 맞춰 달아나준 덕에 무사히 화를 피하였다. 송씨가 잘 한것 하나 없고, 누가 미리 알고 이런 일이 벌어졌던 것도 아니었으나, 아무튼 여차저차 해서 그가 다시 소실을 들이는 일은 이후에도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대오각성하여 난데없이 성실한 지아비가 될 것도 아닌지라, 팔도 수력발전소를 배경으로 한 허랑방탕은 이후로도 당분간 계속되었다.

이 옛날이야기 시리즈가 다 그렇지만, 역시 이야기의 주제나 교훈은 없다. 짧게 후일담을 덧붙이자면, 송씨는 천벌같은 거 안 받고 나이 들어 평안히 천수를 다했고, 그 슬하의 남매, 그 중 두 오빠들은 자기들이 자식 낳고 손주 볼 나이가 되어서까지 (역시 자식 낳고 손주 볼 나이가 된) 여동생을 낄낄 너 이 배신녀야… 하고 간간히 놀려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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難堪時代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슈테판 츠바이크가 이런 기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근 3년만의 포스팅 치고 정말 징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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