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손톱 밑이 아프구먼

건담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가장 건담같이 생기지 않은 키트만 찾아 만드는 주제에 왜 건프라를 만드는 것인가?

MSJ-06II-E TIEREN Space Type
(그래… 솔직히 저 다리의 가스통하고 둥글넓적한 가슴팍에 꽂혀서 사 왔다구)

그야 건프라가 가장 쉽고 편하니까 – 부품 아귀가 잘 맞고 사출도 잘 되어 나온다. 플라스틱이 고급이라 어지간해서 뭉개지거나 쪼개지지 않는다. 덕분에 건프라 만들땐 신경 곤두세우지 않아도 망치는 일은 잘 없다. 음. 일본의 공업기술이란.

하나 더. 요새 건프라들은 색 분할이 엄청 잘 되어있는데다 기본 플라스틱 색깔도, 스티커도 그런대로 좋아서 색칠 안해도 굉장히 그럴싸하다.

이 밖에도, 요새 건프라들은 쬐그만 놈들도 관절의 가동범위가 대단해서 갖고 놀기 좋다든가, 마이너한 기체들의 변종이 줄줄이 나와서 모으는 맛이 있다든가 하는 이유로 건프라를 열심히 만드는 분들도 있는 줄 알고 있으나, 그야 나와는 상관 없는 이유다. 포즈 잡으며 노는 일도 별로 없고 딱히 모은 적도 없으니까.  난 그저, 들인 공에 비해서 만들고 나면 보기 좋은 게 건프라라는 이유로 건프라를 만든다. (이 기계가 나오는 건담 OO(“더블 오”라는군)는 본 적도 없다네)

대충 만든대도, 내가 만드는 방식이 좀 이상해서 조그만 거 만드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린다. 아무튼 칠을 안 하니까 런너 잘라낸 자국을 지우는 게 가장 힘이 든다. 적어도 런너자국 없애는 부분 만큼은 본격적으로 프라모델 만드는 사람들 보다 더 공을 들이는 거 아닌가 하고 스스로 생각한다. 필요한 만큼 갈아낸 뒤 칠해서 덮는 게 불가능하니까 최대한 잘 자르고 잘 다듬는답시고 별 짓을 다 한다. 내 연장통에는 뜨개바늘과 기타 피크까지 있는데, 쪽팔려서 그걸 어떻게 쓰는 지는 좀 밝히기 그렇다.  아무튼 그래 봐야 단차 수정도 안 할 거면서 뭘 그리 열을 내나,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단차는 금형이 만든거지만 런너자국은 내가 만든거 아닌가. 하하. 하. 하…

단차와 런너자국의 문제보다도 나 스스로를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속 채우기이다. 나는 건프라를 만들 때 속을 실납으로 채운다. 내부에 공간이 있는 곳 마다 적당히 납으로 채워가면서 다 만들고 나면 꽤 묵직한데, 이게 뭐랄까 손맛이 있달까… 볼 적에도 뭔가 무게감이 있달까… 무게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닌데 좀 미쳤달까 헛소리가 심하달까…

그리고, 칠은 안 하지만 먹선은 넣는다. 먹선만 넣어도 프라모델의 완성도는 확 올라간다… 고 생각한다. 뭐, 반쯤은 먹선을 가장한 웨더링이랄까, 가느다란 네임펜과 굵직한 매직, 라이터기름과 면봉으로 낑낑대며 모서리마다 줄을 긋고 패인 곳 마다 꺼먼 잉크를 쑤셔 박았다가 닦아냈다가 하는 것이다. 아마 내가 20년쯤 더 일찍 태어났다면 지금의 내가 하는 짓을 이해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젠 늦어버려서, 앞으로 20년이 지난대도 이 짓을 완전히 그만둘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결국 위의 티에렌 우주형인가 하는 13센티짜리 하나 만드는데도 약 12시간 걸렸다. 아니 뭐래냐, 밥쳐먹고 할 짓이 그렇게 없냐, 참 쓸데없는 짓에 뼈골 빼고 있네 등등의 자괴감이 들 때 마다 새삼 단호하게 칼질을 하고 사포질을 하고 먹선을 긋는 것이다. 그리고 완성한 뒤, 아픈 눈알과 허리와 목을 돌리며, 런너자국을 지우느라 플라스틱에 문질러대서 너덜너덜한 엄지손톱에 반창고를 붙이고, 너무 오랫동안 숙이고 있느라 붓고 개기름이 흐르는 얼굴을 들어 다 만든 건프라를 바라본다. 그 순간에 밀려오는 감동이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데다 양도 별로 안 되는 것이라, 역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에 또 흥분해버렸다는 회한만이 남는 것이다. 내가 왜 이짓을 한 거지?

아마 나는, 쓸데없는 짓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허비해야 스스로 여유롭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뭐 애초에 여유라는 걸 허비하지 않으면 그게 왜 여유란 말인가. 여유시간을 유용하게 보내는 여러가지 방안을 내 놓는 잘난 사람들이야말로 남의 여유시간을 빼앗는 양아치들이라는 이야기이다… 라고 내가 흥분하는 것도 뭔가의 자괴감이 표출되는 것인가 아닌가… 쳇.

뭐, 덤으로 설명서에 씌여있던 설정자료의 번역.

1/144 scale model HG GUNDAM OO-10 MSJ-06II-E TIEREN Space Type

티에렌 우주형
형식번호 MSJ-06II-E / 머리높이 18.2m / 본체질량 127.5t
무장 200mm x 25구경장활공포(우주형) / 30mm기총

인류혁신연맹의 우주용 양산MS. 이 티에렌 이전에 널리 사옹되었던 MSJ-04 판톤은 화석연료타입의 기체로, 실질우주형은 존재하지 않았다. (판톤은 현재 수출용기체 “암프”가 되었다). 이 기체는 태양광발전분쟁이 격화됨에 따라 우주에서의 전투에 투입하기 위해 개발된 기체다. 채용된 지 10년 이상 경과하였지만, 세부개량을 거듭하며 현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부 기능은 상당히 구식이 되었으나 사용된 기술의 신뢰도가 높아 드물게 고장이 나는 때에도 수리하기 용이하다. 양 다리에 장착된 탱크에는 물이 들어있다. 이것은 이대로 추진재로 사용될 뿐 아니라 방패 대신으로도 사용된다. 보통 한 다리에 하나씩 장비되지만, 장거리 이동의 경우에는 여러 개를 연결하여 사용하는 일도 있다.

인혁군에서, 티에렌 타입의 기체는 변형기체가 풍부하면서도 조작시스템이 통일되어있어 특히 조종하기 쉬운 기체가 되었다. 우주형은 지상과는 매우 다른 우주환경에 맞춰 그 조작법 역시 큰 차이가 있지만, 다른 진영의 기체와 비교하면 티에렌 우주형은 배 이상의 속도로 숙달할 수 있다고까지 한다. 한편, 인혁군의 경우에도 티에렌 타오츠에 전방위 모니터가 채용되는 등 새로운 조작계의 모색이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전방위 모니터는 정보처리량이 많아 현상태로는 일반 파일롯에 의한 조작을 목표로 삼지는 못하고, 상당부분 개량의 여지가 남아있는 상태다.

이 ‘진지한 척’하는게 웃겨서 좋다니깐. 이런 거 달달 외우는 거나, 포켓몬 이름 외우는 거나, 냉전시대 핵 군축협상 이름하고 연도 줄줄이 외우는 거나 기본적으로 다를 건 없겠지.

아무튼 다리에 달린게 가스통이 아니라 물통이란 건 좀 깜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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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on “아직도 손톱 밑이 아프구먼
  1. ScrapHeap말하길

    역시 좀 어설픈 점이 아쉬운 모델..이랄까 기체?
    대체로 건담 안 같이 생긴 주제에 저 허벅지는…

  2. WoKi말하길

    까놓고 말해서, 적당적당 그럴싸하긴 해도 별로 기계에 대한 고민이나 애정이 느껴지진 않는 디자인이지.
    정말이지 특히 허벅지에서 안이함이 느껴지잖아.
    건담이라도 주인공급 기체는 적어도 디자이너의 애정이랄까, 시청률에 대한 집념이 느껴지는데 말이야.

  3. GB말하길

    아무래도 저 물통은 여러모로 신경쓰이네요.
    모양이라든지, 붙어있는 위치라든지, 아니면 용도라든지…
    (혹시 식수를 담을 수 있어서 유사시 소방차처럼 물을 공급한다든지 하는건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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