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펭귄

<전략>…펭귄의 자기소개를 듣던 나는 뭔가 크게 속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놈의 주장에 따를 때, 놈은 말하자면 언어 그 자체였던 것이다. 사람의 날숨은 성대를 울리고, 그 울리는 공기는 구강과 비강을 통하면서 음성이 된다. 음성은 공기를 타고 상대편의 고막에 닿으며, 고막의 진동은 달팽이관인지 우렁이관인지를 통해 청신경을 자극하고, 자극받은 상대편의 뇌 속에 이런 저런 내용을 남기거나 남기지 못한다. 사실이건 아니건 중고등학교에선 이렇게 가르치고, 나는 그렇게 배웠다. 헌데 펭귄의 주장은 달랐다. 사람이 한 말을 다른 사람이 알아듣는다는 설명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말을 할 때, 실질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밖에는 이해 못하는 그저 생각 덩어리들뿐이고, 무슨 용천지랄을 해도 그걸 다른 사람이 알아먹는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는 것이 펭귄의 주장이었다. 아니, 애시당초 인간은, 다른 인간과 의사를 소통하는 따위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게다.

“아니, 하지만 사람들은 분명히 대화라는 걸 하고 있잖아요.”
“그게 다 우리, 투명펭귄 덕이다 이 말이야.”

투명펭귄들은 사람이 싸질러놓은 생각 덩어리들을 먹고 소화한다. 그런 다음 다른 사람들 머리에 부리를 박고 그 소화된 덩어리를 토해놓는다. 자기 애기들한테 밥 먹이듯이. 아무튼 투명펭귄은 투명하고, 광속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이 모든 과정은 인간들에게 인식되지 않는다… 고 한다.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믿지 마. 그럴 필요 없어. 세상에 그런 펭귄이 어디 있겠냐. 너네들은 그냥 살던 대로 살면서 우리 같은 건 없는 셈 치고 살면 그만이야. 안 그러냐? 니네가 보기에 물리학적으로는 투명펭귄 따위 없는게 맞잖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댁의 말을 듣다 보니 화가 날려고 하는데요.”
“그건 니 사정이고. 애초에 날 안 봤으면 될 것을. 증거 따위는 없지만 그 비슷한 건 있는데, 이렇게 생각 해 본 적 있나?”

인간들은 동식물 및 균류를 상대로 별의 별 짓을 다 한다. 안 먹는 게 없고, 아무거나 죽이고 다닌다. 털이라는 털은 다 뽑아다가 실이다 옷감이다 베게 속이다 해 가며 쓸데 없는 것들을 만들고, 가죽이라는 가죽은 다 벗겨다가 장갑도 만들고 가방도 만들고 가죽쫄바지도 만든다. 핑계가 없으면 그냥 죽이면서 사냥의 즐거움을 논한다. 그런데, 펭귄은?

펭귄 털이나 가죽으로 뭘 만들겠다고 설치는 놈들은 없다. 펭귄 고기를 먹는 인간도 사실상 없다. 이 거대한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차가운 톱니바퀴, 악마의 맷돌, 무한의 상품연쇄 속에서 펭귄만큼은 0.9mm 정도 어긋나있다. 그저 자연다큐멘터리 화면에 나오는 귀엽고 뒤뚱거리는 펭귄들, 수족관에서 헤엄치는 팔자 좋은 펭귄들이 심미적 즐거움의 대상이 될 뿐이다.

이 모든 것이 펭귄들의 음모인 것이다.

펭귄들은 사춘기가 지나고 인생(펭귄생?)의 시련과 고난, 존재론적 고뇌를 알 나이가 될 때 쯤 해서 어느 날 몸이 투명해진다. 그 때부터 의미와 개념을 전달하는 투명펭귄으로서 인간사회에 침투하여 암약하는 것이다. 투명펭귄은 근무연한을 다 채우고 나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다시 질량을 가진 불투명 일반 펭귄으로서 펭귄사회에 복귀한다. 당연히 투명펭귄들은 펭귄 친화적이지 않은 일체의 인간활동을 배제한다. 이건 활동을 방해한다는 게 아니라, 정말로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이다. 펭귄에 대한 불만스러운 언사는 어느 새 아유 귀여워라, 혹은 참 멋있네, 따위의 말로 이해된다. 누군가 펭귄에 적대적인 사고나 행동을 할라 치면, 투명펭귄은 그 인간을 순식간에 인간사회로부터 배제시켜버린다. 그 사람은 말 같지 않은 헛소리나 지껄이고 돌아다니는 미친 놈 취급 받거나, 남의 험담이나 하고 다니며 더러운 농담을 즐기는 인간 쓰레기가 된다. 그보다 더 간단한 방법도 있다.

“실어증의 95%는 무의식중에 펭귄에 적대적인 생각을 품은 것이 원인이라네.”
“허, 무의식 말입니까. 그것까지 통제한단 말인가요?”
“우리로서는 당연한 일이지. 거시적으로 볼 때 그 쪽이 더 편하단 말이야.”
“그렇게 잘나신 분들이 왜 바다사자니 북극곰, 범고래 따위에게 잡아 먹히는 겁니까?”
“생각해 봐. 그 잘난 놈들이 왜 멸종위기에 처했겠냐?”

펭귄은 담뱃불을 붙이며 야비하게 웃었다…<후략>

Malimology 에 올린 글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

다음의 HTML 태그와 속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trike> <str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