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들에게 저주 있으라

그는 외치고 있었다.

기억과 의식보다 깊은 곳, 자아와 무의식보다도 더 낮거나 높은 어디엔가 깃들어 있을 종족의 추억마저도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외친다. 그는 자신과 그의 동료들이 처한 상황에 경악하며 공포조차 배신당하는 배신을 느꼈다. 검고 단단한 지면. 누군가에 의해 주의 깊게 준비되었을, 기름으로 질척거리는 발 밑. 주위를 둘러 싼 절벽은 그 꼭대기와 사면의 매끄러운 지형을 훤히 드러내 보이며 철저한 탈출 불가능을 웅변하고 있었다. 분지의 중앙에 옴짝달싹 못하게 몰리고 만 중대원들은, 그들의 발밑이 늦잠에서 깨어나는 휴화산의 화구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혹한 속에 뼛속까지 얼어붙어 아직 풀리지 않은 몸으로는 납득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발밑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납득. 납득할 수 없다. 눈앞에 닥친 상황을 현실로서 받아들이지 못한 채, 어떻게든 해석하고, 말을 갖다 붙이고, 그럴싸한 결론을 이끌어 내서 자신이 처한 곤경에 주석을 단다. 그럼으로써 지금 당장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유를 만들고, 당장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망각하고, 그러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몰아갔던 자신에 대해 사고를 정지한다. 그는 이와 같은 자들을 경멸했고, 그러한 자들로 이루어진 세계에 무한한 환멸을 느꼈다. 그래, 좋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따위 비난은 하지 않겠다. 그러나 정말 당신들은 그것 밖에 할 일이 없는가? 그렇게 휩쓸려 가며 이럴 수는 없다는 둥, 그것은 저래서 옳지 않고 세상은 이러저러 해야(했어야) 한다는 둥 지껄이고 있다 보면 좀 편한가?

그러나 이제 그는, 불가해한 상황 앞에서, 경멸해 마지않던 세계에 대한 주석자들을 납득은 못 할지언정 용납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철저히 무력한 지금 그 스스로 그러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었다.

소속한 집단과 동료들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속한 특수중대의 구성원들은 태생적으로 체구가 작고,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연약한 외양을 지닌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선별, 세대를 거쳐 추구되었던 종족적 변성의 결과였다. 그들은 지상에 붙어 구르고 뒹구는 자들과는 달리 수직적 움직임에도 적응되어 있었다. 그들의 작고 섬세한 근골과 민첩한 움직임, 내면의 옹골참은 일백근 철퇴와 비교될 수 있는 한 방울의 맹독과 같은 것이었다. 머리가 터지는 것과 창자가 녹는 것 중 어느 쪽을 원하시는가. 어쨌든, 결과는 동일한 죽음으로 수렴하며,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비록 우리는 작고 무르지만, 죽을 자를 죽이는 이상 어찌 죽이든 매한가지 아닌가.

그러면 죽을 자가 죽게 된 이상 어찌 죽든 매한가지 아닌가… 그는 자신이 지금껏 회피하듯 견지하던 이 단순한 믿음, 자존의 근거를, 당면한 스스로의 종말에 대입하기 버거웠다. 지금껏 어깨를 맞댄 동료들. 한날한시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한시에 죽을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최후의 합당히 예정된 형태가 무엇인지 탄생의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그 최후로서, 그 최후로써 그들은 정의되어 있었다! 모든 존재는 그렇게 정의되어 있음을 그들은 알았고, 스스로의 최후가 어떠할 것이며 어떠해야 하는 지조차 알지 못하는 다른 존재들에 대해 그들, 아는 자들이 갖는 자존감은 지고하였다. 최후에 대한 인식은 예감이나 예상 따위가 아닌 차라리 추억이었고, 따라서 끓어오르는 열수의 심연으로 뛰어들 그 최후의 순간을 떠올릴 때 그가 품는 감정은 환희와 향수의 황금비율로 빚어진 것이었다.

십분 전, 고양감에 휩싸인 중대원들 앞에서 중대장은 짤막하게 말했다. 제군. 오늘 우리는 완성된다. 가서 너희를 성취하라… 우리는 무겁게 떨었다. 환호성은 없었다. 그따위 소란은, 자기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도 예상치도 못한 저열한 자들이 결국 스스로의 어줍잖은 짐작이 빗나갈 때 외치는 것, 당황을 변명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길고 깊은 어둠과 극한의 추위 속에서도 미래를 알았다. 드물게, 다만 한순간 씩 비치곤 했던 창백한 유자빛 태양이 우리의 몸을 녹이는 일은 없었으나 그 안에서도 우리는 열수의 환희를 보았다. 우리가, 중대장의 마지막 말에 가볍게 스치던 머뭇거림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그러한 환희의 확신에 우리 스스로 귀를 막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오분 전, 여기 우리의 죽을 곳에 서서 우리는 이제 찢어 외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당황을 변명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저열해진다. 예리하게 다듬어진 종족의 몸은 더 이상 무용하다. 중대장은 애써 우리와 시선을 마주하며 말한다. 우리는 상부의 지시를 따를 뿐이다. 사수하라. 쓰러지지 말라. 자세를 유지하라. 쓰러지지 말라… 그렇다. 우리 종족의 작은 체구와 연약한 거죽은 이 메마른, 뜨거운,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사지에서 작고 연약할 뿐이다. 절망 속에서 외치다 기력이 다한 자는 쓰러지고, 곧 터져나가 끓는 체액을 바닥에 쏟으며 흩어진다. 선 채로 옆구리가 터져 열리고 머리가 쪼개지고 밑이 빠진다. 열수 속에서 위로, 아래로, 좌로, 우로, 삼차원의 모든 축을 민활히 노닐며 완성되었을 우리는, 이 저주받을 분지에 빽빽히 갖혀 선 채로 위로, 아래로, 좌로, 우로 뒤틀리고 터지고 쏟아지고 익어간다. 저들은 누구인가… 나를 이렇게 빚어 형성하고, 이렇게 정의하고, 이렇게 존재하게 한 연후에 그 모두를 부정하는, 이 검은 화구에 나를 쳐 넣은 저들은 대체 누구인가. 우리의 앎은 안다는 믿음에 불과했던가…

뜨겁다. 바닥에 흥건한 우리 체액이 끓는다. 환상. 열수의 환상을 본다. 시야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발과 몸을 적시는 환상 속에서 마지막까지 외친다. 이것은 내 당황을 변명하는 것이나, 너희는 마땅히 나의 슬픔을 알라. 너희는 마땅히 우리의 슬픔을 알라… 물만두를 굽는(*주) 자들에게 저주 있으라… 물만두를 구워 먹는 자들에게 저주 있으라……

-

*주: 방법은 다음과 같다.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얼어있는 물만두를 가지런히 세우고, 뒤집거나 뒤척이지 말며 약한 불에 익힌다. 만두가 다 익고 만두 바닥이 노릇해 질 때 쯤 프라이팬 하나에 소주잔 반 잔 정도의 물을 부은 뒤 뚜껑을 덮고 3 내지 5분 정도 더 익힌다. 반쯤 바삭하고 반쯤 부드러운 만두가 되는데, 간장에 참기름을 떨궈 유장을 만들어 찍어 먹는다. 물만두 아닌 다른 만두로도 이렇게 할 수 있으나 물만두가 가장 맛있다. 물만두는 피가 얇아서 특히 불을 약하게 하고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으면 익기 전에 타거나 터지게 되므로 주의할 것.

공방, 이야기 에 올린 글 태그됨: ,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

다음의 HTML 태그와 속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trike> <strong>